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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우리교육 2015년 가을호
[에세이]
폭력을 대할 때 최소한의 전제 조건 | 이희진
폭력을 대할 때 최소한의 전제 조건
수많은 학교 폭력 처방전에 대하여


글. 이희진


폭력을 대하는 견딜 수 없는 가벼움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라는 TV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사례 제보자가 직접 방송에 출연하여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고민이 되는 것을 털어놓으면 방청객들이 사례를 보고 듣고 정말 고민되는 일이다, 또는 그렇게 심각한 고민은 아니다 판단을 하고 버튼을 눌러 투표를 합니다. 그렇게 눌린 버튼의 수가 많으면 상품을 주는 방식이죠. 심야 시간대에 방송되면서도 월요일 종합 시청률 순위 4위를 차지하는 인기 있는 방송 프로그램입니다.
지난 8월 10일 이 프로그램에 여덟 살 어린이가 제보자로 등장했습니다. 최연소 참가자라 등장부터 이목을 끌었는데 고민의 내용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상적으로, 매우 자주 본인에게 욕설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빠가 매일매일 욕하고 인상 써서 방학 땐 꼭 ‘안녕하세요’ 에 나오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한테 아빠가 씨×라고 하고 개××, 쌍×라고 해요.”라는 주인공의 말에 방청객과 진행자 모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주인공은 아버지가 자신을 때려서 뉴스에 나오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방송은 늘 그렇듯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그렇게 상처받고 있는지 몰랐다며 사과를 했고 앞으로 욕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주인공은 “아빠 사랑해요.”라며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쳐 주고 주인공은 하트를 만들고 일상적으로 욕을 하던 아버지가 웃는 장면은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방송 중에는 여덟 살 어린이에게 쏟아지는 이 욕설들이 얼마나 충격적인지를 열심히 강조하다가 끝에 가서는 갑자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정에 있는 소소한 잘못, 그것도 그 잘못은 아버지의 마음먹기에 따라 고쳐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이 말입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마냥 급작스러운 전개라는 점도 당황스러웠지만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폭력을 대하는 견딜 수 없는 가벼움 그리고 당사자를 대하는 무례함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폭력은 어떨 때는 너무 과도하게 또 어떨 때는 너무 가볍게 다루어집니다. 흔한 예로 성폭력 가해자들에게는 ‘사람이 그렇게 실수할 수도 있지’ 등의 방식으로 폭력을 가벼이 대하는 반면, 피해자들에게는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라는 말로 과한 무게를 실어 폭력을 대함으로써 오히려 당사자들을 억압합니다. 폭력이라는 것은 가해자들에게 더 유리한 사회구조의 결과이고 때문에 너무 당연하게도 그 폭력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또한 피해자들보다는 가해자들에게 더 관대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폭력을 마주할 때 어떠한 태도와 어느 정도의 무게로 대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바라볼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폭력을 제대로 마주하게 하는 디딤돌이겠지요.



학교 폭력 처방전들에 담긴 폭력성
학교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012년 이후 학교 폭력에 대한 수많은 처방전들이 쏟아졌습니다. 나는 이렇게 해서 학교 폭력을 해결했다, 나는 이렇게 해서 학교 폭력을 줄여 나가고 있다는 학교 현장의 사례들도 많습니다. 굉장히 값진 사례들입니다. 실제로 실천하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시도들이야말로 교육적이고 실체적이니까요. 하지만 그 사례들에서 종종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를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노골적인 인권침해만큼이나 태도가 무례하고 폭력적이라서 분노하게 되는 경우도 제법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굉장히 가혹한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에게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이지 잔인하니까요. 그러나 또 다른 부조리를 생산해 내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디로 달려가느냐가 더 중요할 때도 훨씬 많으니 말입니다.
학교 폭력의 사례들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무례함은 학생들이 ‘몰라서 그런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순진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폭력에 대한 감각은 본능에 속하는 감각입니다. 누가 나를 위협하는지, 내가 지금 누구를 위협하고 있는지, 내가 위축되어 있는지 억압하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은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몰라서 그런다’ 는 접근은 문제를 순진하게 바라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역시 폭력을 대하는 가벼운 태도라는 점에서 피해자들에게 저지르는 무례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정말로 학생들이 몰라서 그런다면 학생 사회에서 서열이 생겨나지도 않겠지요. 버스에서 실수로 발을 밟은 걸로 서열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요. 학생 간 폭력의 주요한 특징은 지속성과 관계 기반성이고 이 두 가지 특성은 모두 권력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경기도에서 시민교육 활동을 해 오고 계시는 정경수 선생님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든 가해자든 양쪽 모두 학교 폭력과 권력에 민감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학생 간 폭력에서 늘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프레임에 익숙한 우리 모두에게 매우 시사점이 큰 말입니다. 즉 피/가해자 모두 폭력의 수레바퀴가 더 크고 더 잘 보이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누가 바퀴에 깔리고 누가 그 수레바퀴에 올라타느냐의 차이겠지요. 이러한 현상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일입니다.
오래된 일이니 가만히 있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폭력과 싸워 온 것 역시 인류 역사이고 그것이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 왔습니다. 학생 간 폭력과 맞서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 학교 사회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결코 이 문제를 학생들이 ‘몰라서 그런다’로 여기지 말자는 겁니다.
특히 폭력이나 인권침해에서 그 원인을 당사자들의 무지로 찾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해결하고자 하는 선의의 노력이 오히려 당사자를 억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지를 원인으로 찾는 것은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영역에서 유독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청소년 알바 노동을 이야기하며 사업주의 행태를 ‘몰라서’ 당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앞서 말하기도 했지만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을 포함하여 수많은 피해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억압을 당하면 이 사람이 진심으로 이러는 게 맞나, 실수는 아닌가, 내가 뭘 잘못했나 등등 수없이 스스로에게 질문부터 던집니다. 억압의 구조가 치밀한 공간일수록 내 스스로를 약자의 위치로 자각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외면은 더 길고 더 강하게 이루어집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모르는 척’입니다. 학교 폭력의 해결을 지원하고 돕고자 하는 사람-교사가 할 일은 학생들이 ‘모르는 척’ 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과 틈을 만드는 것입니다.



폭력 학습에서 폭력에 마주할 수 있는 경험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접근과 폭력에 마주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한다는 접근은 동일한 실천을 전혀 다르게 만들어 버립니다. 평화샘 프로젝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STOP!’ (학생 간 폭력이 일어났을 때가/피해자는 물론 그 공간에 있는 누구든 stop을 외쳐 그 상황을 중지시킬 수 있고 학급 회의를 개최할 수 있는 평화샘 프로젝트의 한 방법). 학급 회의를 하고 회의에서 폭력을 다루는 것을 배우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과 폭력을 외면하지 않고 공동으로 폭력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다릅니다. 말하자면 학습목표가 다른 것이겠지요. 실제 활동에서는 그리 큰 차이를 가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관점이라는 것은 깊고 얕게 모든 곳에 뿌리내려 전체를 완전히 다른 성질로 만들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공간적으로도 권력적으로도 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현재의 교실 사회에서 폭력에 대해 공동으로 이야기하고 공동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 그것을 구조화하여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무지를 문제의 원인으로 접근했을 때 내려지는 가장 흔한 처방은 폭력에 대한 ‘학습’입니다. 모른다 생각하니 가르칩니다. 이것은 학교 폭력이고 이것은 인권침해이고 이것은 집단 따돌림이고 이것은 금품 갈취이고……. 이런 방식의 학습은 학교 폭력 예방 교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준법 교육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습니다. 무엇이 범죄인가에 입각해 있고 폭력에 대한 유형화된 분석은 처벌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경찰관이 학교에 와서 하는 교육을 보고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들이 이것입니다. 사법적 관점에 기반을 둔 준법 교육은 학생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범죄인지 알려 주고 어기면 처벌할 거라고 알리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라기보다는 ‘고지’에 가깝습니다.
물론 사법적 고지에 의해 학교 폭력 사례는 줄어들 수 있습니다. 사법적 고지를 듣는 것은 또한 사회 구성원의 권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교육’이라고 이름 붙이고자 한다면 학교 폭력에 대해 사법적 기준보다는 그 이상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굳이 그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대부분 법적 개념보다 상위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이라는 것은 법적 기준에서 다룰 수 없는 것, 앞서 말한 권력과 관계의 문제가 촘촘히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 학교 폭력을 다룬다면 최소한의 전제 조건은 법적 기준을 넘어서서 권력과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일 겁니다. 스쿨폴리스보다 교사가 학생들과 학교 폭력에 대해 더 잘 논의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전제 조건 이상을 갖추고 있어야 할 테고 말입니다.
덧붙여, 교육에서 이루어지는 사법적 접근이 가진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은 타율적 기준에 의한 것이라는 겁니다. 생활지도가 학생 통제를 넘어 진짜 생활교육으로 바뀌려면 특히 이 부분이 주목되어야 합니다. 모든 규칙이 모든 사회 구성원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누구든 이미 규칙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회 속에서 태어나니까요. 그래서 기존 사회 질서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 타율적 규범을 준수하는 교육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뿐이라면, 교육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 않을까요?
교육은 사람의 성장을 위한 것이고 또한 교육 참여자가 교육을 통해 배운 것을 스스로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이러한 것은 학교 폭력이니 혹은 규정 위반이니 하면 안 된다는 것은 규정에 대한 복종 외에는 어떠한 능력도 학생으로 하여금 갖게 하지 못합니다.



학생 통제를 넘어 폭력에 대처하는 능력 함양으로
학교 폭력의 해결을 교육으로 논하자면, 그리고 교과 내용 외에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이야기한다면, 또한 여러 명의 공동인 사회생활 속에서 생활교육을 이야기한다면 학생들이 규범을 만들고 조절할 수 있는 경험치를 쌓고 그러한 능력을 갖게 지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법적 기준보다 더 높은 기준을 서로에게 요구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법적 기준보다 현저히 낮은 기준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사법적 기준보다 높은 기준의 흔한 예로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를, 사법적 기준보다 낮은 기준의 흔한 예로 무단 횡단을 들 수 있습니다. 무단 횡단은 도로교통법에 의해 20만 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단 횡단 하는 사람을 범죄인으로 대하진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주변 사람들끼리 규범의 밀도와 수준을 조절하는 겁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이런 경험들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하고 지원해야 합니다. 사법적 기준을 20 ~30명 학급 단위에 항상 적용할 수 없습니다. 사법적 기준을 주변 두세 명에게 적용해서 반박할 수 없습니다. 학교 사회 안에서는 사법적 기준이 적용될 때보다 안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 어디까지를 구성원들이 잘못으로 판단할 것인지, 잘못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특정 누군가에게만 가혹하거나 관대하진 않은지 규범을 평가하고 조절하는 경험을 여러 번 가지며 내부 규율과 타율의 균형과 상호 관련성을 자신의 능력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규정을 통해 어린이 청소년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지금의 생활지도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프레임의 전환이기도 합니다.
생활지도는 엄하냐 엄하지 않냐의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그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저급함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접근입니다. 심지어 온갖 매체에서 자신의 자녀를 체벌한 이야기로 엄하고 바른 교육의 예를 드는 사람들을 보면 늘 저는 사법적 고민에 빠집니다. 저 사람들을 아동 학대죄로 신고해야 할 의무가 교사인 제게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국 사회의 어린이 청소년 인권은 사법적 기준보다 현저히 낮기에 더 열심히 활동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죄책감을 대신하곤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폭력을 마주하는 자세에 대한 성찰이 노력과 함께 필요한 시대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교육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이희진 jinnyang3@gmail.com
대구 서도초 교사입니다. 학교 내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하고 교사도 학생도 해방일 수 있는 운동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인권교육센터 ‘오리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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